1885년 6월 21일 주일 저녁
조선 첫 정주선교사인 알렌 선교사 부부, 미북장로회 제1호 조선 선교사로 파송받은 헤론 선교사 부부 그리고 스크랜턴 대부인 (스크랜턴 선교사 어머니)이 알렌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함께 첫 공식주일예배 (first Stated Sunday service)를 드렸다.
감격적인 첫 공식주일예배는 이후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그리고 외교관 포크 등이 참석하는 정기적인 주일 예배로 자리를 잡게 된다.
특히 제중원 신앙공동체에서
이처럼 제중원은 비록 외형적으로는 병원이었지만 공식 선교가 허락되지 않았던 조선선교의 초기에 주일예배와 성찬식 및 세례식이 베풀어지는 완전한 신앙공동체인 제중원교회였다.
제중원교회는
스코틀랜드 회중교회 목사 아들인 헤론 선교사가 비록 순교하기까지 짧은 5년의 선교 기간이었지만, 그가 행한 의료선교사이면서도 회중교회의 평신도 목회자 선교사역은 제중원교회를 조선 선교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1887년 9월, 헤론 선교사가 알렌에 이어 제중원 2대 원장으로 취임한 후 그의 사역을 통해 제중원의 삼중적인 정체성인 병원, 교육, 교회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곳 사역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100마일 떨어진 마을에 세례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20-30명 정도 있는데 너무도 가난해서 세례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것을 어렵습니다... 벌써 여기서 1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언더우드 씨를 도와 3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우리 자신만 알고 있으면서 아주 조용히 그 일을 치렀습니다.”
(헤론의 일기, 1887년 9월 4일 중에서)
이후 1887년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정동교회를 조직하였고, 1890년 7월 26일 헤론이 순교하기까지 제중원교회를 섬겼다. “우리 사역은 아주 빠르게 진척되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매주일 성경공부반을 시작했습니다. 8~20명의 여성들이 모입니다... 우리 교회가 조선의 요구에 부응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교회들도 와서 사역을 했으면 합니다. 영적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있고 그들 모두를 위한 처소가 있습니다.”
(헤론의 일기, 1888년 3월 19일 중에서)
그러나 헤론이 갑작스러운 순교로 제중원은 부분적으로 운영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제중원은 1893년 에비슨 선교사 입국하여 제4대 제중원 원장으로 사역하면서 정상화되었고, 1894년 9월 26일 정부로부터 독립한 완전한 선교기관이 되었다. 1904년 남문밖에 세워진 세브란스 병원은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전문화된 의료선교를, 1910년 전문화된 복음전파를 위해 병원건물에서 독립한 남문밖교회는 선교사, 병원직원, 환자와 보호자, 선교사가 세운 학교 학생, 그리고 일반인까지 모두 함께 예배드렸고, 장로교공의회의 장소 등으로 사용되는 등 ‘중앙 교회’라고도 불리며 사명을 감당하였다.
1928년 유치원 소풍
1945년 3백만 부흥전도회
조직 교회가 된 남대문 교회는
병원 교회로서 세브란스 병원 및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함께 “교회-병원-학교”의 ‘트라이앵글선교전략’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남대문교회에서는 민족의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드라마 제중원으로 잘 알려진 백정의 아들로 최초의 공인 의사가 된 박서양과 김필순 등 세브란스 의학교 학생들 ,
3.1운동의 주역인 함영태 조사, 이갑성 집사, 이용설 장로,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 등 수많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출석하였다.
또한, 서상륜, 김익두, 김치선와 같은 한국 초기 교회 지도자들의 사역지였으며 중공군 포로를 위해 섬기다 순교한 순직자 맹의순 선생님도 남대문교회를 섬겼다.
광복후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 이북 성도들의 집결지 및 민족복음화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기도 하였으며, 보육원과 유치원, 대한신학교와 월드비전의 창설에 기여하는 등 교계와 사회를 위한 책임을 감당하는데도 그 역할을 감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