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교회는 3.1독립운동을 전개함에 먼저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독립선언의 기본적 의견을 중지로서 결속시키는 데에 구심점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3차에 걸친 회의 끝에 천도교, 불교측이 합동하여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시켰다. 또한 선교사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에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인식시켰으며, 그 도움을 얻을 수 있었는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양선, 『3.1운동과 기독교계』 242쪽)
“그때는 나라일하고 교회일하고 똑같았어요. 다시 말하면 우리 믿는 사람이 마땅히 나라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다가지고 있었거든요. 교회 교역자들이 나라일 하는데 참여하는 걸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남대문교회에서 협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협조하려는 생각을 일본교인들도 가지고 있었어요.”
(3.1운동 당시 학생진영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용설 장로 증언)
함태영 조사는 3.1운동의 매우 중요한 지도자였고, 이갑성 집사는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었고, 이용설 청년은 독립운동 이후의 일을 처리할 학생진영의 대표자 중 한사람이었다. 함태영 조사와 이갑성 집사는 옥고를 치뤘고, 이용설 청년은 중국으로 망명,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난 후 나라사랑하는 의료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남대문교회 교인들은 함태영 조사와 교인 이갑성의 옥중투쟁을 격려하기 위하여 주일예배가 끝나면 서대문 형무소 뒷동산에 올라가서 찬송과 기도로서 이들을 격려하면 감옥에서도 박수로 응답하곤 하였다.”
(김여성 권사의 증언)